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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민중의 뜻을 무시해서는 원로원도 존속할 수 없다.  그래서 그라쿠스의 개혁 중에서도 일반 시민에게 호평을 받은 법률은 남겨놓았다. 도시 빈민층에 대한 곡물 공급, 군복무중의 비용을 국가에서 지급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또한 경제  계급인 '기사'를 배심원으로선정하여, 그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꾀한 법률도 살아남았다. 원로원도 눈에 띄게  부상하고 있는 경제인의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 시민 이외의 이탈리아주민에게도 로마 시민권 취득의 길을 열어주려고 했던 그라쿠스의 '시민권 개혁법'은 기득권자인 로마 평민한테도 평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원로원은 거리낌없이 폐기처분해 버렸다.기원전 120년 당시의 로마 원로원은, 한니발에게 승리한 100년  전의 원로원과 같은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100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이탈리아는 지중해 세계 전체의 지배자여야 한다로마는 이탈리아 전체의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지배자여야 한다.원로원은 로마 시민 전체의 지도자여야 한다.이것은 일종의 쇄국주의다. 포에니 전쟁에서 거둔 승리가 승자인 로마인을 정신적인 쇄국주의자로 바꾸어놓은 것이다.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좌절한 요인을  대부분의 후세 연구자들은 시기상조론으로  돌린다. 인간은 사실을 눈앞에 들이대지 않는 한 눈을 뜨지 못하는 법이다. 또한 아무리  뛰어난예언자라도 무기가 없으면 실패를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마키아벨리라면, 그의 사상을 입증하는 사례의 하나로 그라쿠스 형제를 들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라쿠스 형제의 생각이 70년 뒤에나마 실현된 것은 무기를 가진, 즉 인간에게 눈을 뜨도록 강요할 수 있을 만한 권력을 가진 율리우스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카이사르를 통해서였기 때문이다.여기서 나는 아무래도 또 한 가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만약 그라쿠스 형제가 호민관으로서가 아니라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 개혁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다.외조부나 부친의 경력으로 보아도, 두 사람이 공화정 로마의 최고위직인 집정관이나, 또는집정관을 역임한 자에게 주어지는 재무관에 선임될 수 있는 확률은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다. 따라서 10년만 기다렸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을 때, 또는 그후 몇 년 더 기다렸다가  재무관에 선임되었을 때 개혁을 추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집정관이나 재무관이 정책 입안자가 된 경우에는 상당히 혁신적인 정책이라도 원로원의 지지를  얻기가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어렵지 않았고, 이를 배경으로 민회에서도 별문제 없이 가결된 예가 적지 않다.그라쿠스 형제의 좌절은 로마 시민의 지지를 잃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원로원으로 대표되는 당시 로마 지식층과 사이가 멀어진 탓도 있었다. 왜 원로원의 양식파인 그들은 그라쿠스형제에게 등을 돌렸는가.나중에 다시 기술하겠지만, 술라는 그의 개혁 중에서도 호민관의  권한을 줄이는 데 이상하리만큼 열의를 기울였다. 또한 술라와 마찬가지로  공화정 신봉자였던 키케로는 그라쿠스형제를 엄격히 비판했다. 고대 로마에서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공화정 시대에는 나빴고, 제정 시대에는 비교적 좋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평민층을 대변하는 호민관의 세력이 강해지는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것은 원로원을 주체로 성립해 있는  로마식공화정의 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당시 지식인들이 품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로마인들은 귀속과 평민간의 항쟁이 한창이었던 시대에도 국내에 두 개의 정부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그래서 관직을 평민층에  개방하거나 호민관을 원로원에 받아들임으로써, 국내에 서로 대립하는 세력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에는 대부분  찬성한다 해도, 그들이 개혁을  추진하는 방식에는 찬성할수가 없었다.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 개혁을 실행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두정  형태의 공화정 체제, 즉 기존 질서 안에서의 개혁이 된다.제정 시대에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이르러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가 높아진  것은, 그들의 개혁이 공화정의붕괴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걱정이 제정 시대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라쿠스 형제의 사심없는 태도가 무엇보다도 칭찬할 만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하지만 나는 또다시 생각한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집정관이나 재무관으로서가 아니라 호민관으로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의미가 없었다는 얘기가 될까.역시 의미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원전 2세기 후반에 로마가 근본적인 개혁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은 체제 내에 있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원로원이라는 '현체제'가 앞장서서 그런 개혁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는 원로원이 현실에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을결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공화정 로마의 융성은 걸출한 영웅 한두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해낸 국가 운영체제에 그 요인이  있었다. 이 점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정설이 되어있다. 한 나라의 융성이 개인의 힘이 아니라 체제 덕분이라면, 혼란도 개인의 역량이 쇠퇴한 탓이 아니라 체제 탓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나이가 젊었기때문에 그들 자신은 분명히 의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나, 그라쿠스 형제가 로마인에게 남긴것은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체제 자체에 대한 의문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그들의 개혁도 원로원의 범위 밖에 있는 유일한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사회적 지위인 호민관으로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형 티베리우스는 7개월, 동생 가이우스는 2년의 활동 기간밖에 갖지 못했지만, 그리고  그동안 실행된 개혁들은 거의 다 물거품으로 끝나버렸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줄곧 성장의 길을 걸어왔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에 접어든 로마에 최초의 이정표를 세웠다.이것이 그들의 역사적 존재이유다. 로마인들도 그후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국에는 그라쿠스 형제가 세운 이정표에 따라 길을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로마 시민들은 그라쿠스 형제가 추진했던 개혁의 진정한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형제의 죽음을 무척이나 애석하게 여겼다. 그들은 가이우스가 죽은  곳에 형제를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기리는 동상과빗돌을 세우고, 마치 자기네 조상의 무덤이라도 되는 것처럼  철마다 거기에 제물을 바치곤했다.티베리우스의 아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가이우스에게는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라쿠스 가문은 여기서 대가 끊기고 말았다. 원로원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딸의 재산까지는 몰수할 수 없었는지,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는  가이우스가 죽은 뒤 나폴리 만 서쪽 끝에 있는 미세노에 별장을 짓고 은둔했다.  칩거했다고는 하기만 집 안에 틀어박힌 채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바닷가 별장에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오리엔트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왕과 제후들이 로마를  방문할 때마다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그녀를 예방했고, 문인이나 학자들도 국적을 불문하고 환대를 받았다. 코르넬리아의 거실은 두 아들이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지적 살롱이었다.애통하게 죽은 형제가 화제에 올라도 코르넬리아가 눈물을 짓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두 아들의 무덤조차 만들어주지 못한 어머니지만, 두 아들을 기려 세운 빗돌에 사람들이 철마다 제물을 바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것이 그애들한테 어울리는  무덤이라고 말했다.로마인들은 그녀의 동상도 만들어 바쳤다. 지금은 대좌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거기에는 '아프리카누스의 딸이며 그라쿠스 형제의 어머니인 코르넬리아'라는  글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던 공화정 로마에서는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드문 일이었다.동상이든 석상이든,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 형제를 새긴 초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30세와 33세에 죽었으니까 생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적고, 공화정 로마  시대에는 그들에 대한 비난과 찬사가 서로 그리고 그것으로 로마를 구하게될 것입니다.행군할 때에도, 전투에 임해서도, 나는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지휘관인 동시에, 여러분과 똑같이 위험을 나누어 갖는 전우로서.신들의 가호에 힘입어, 승리도 명예도 찬사도 모두 우리 것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치고는 꽤 능란한  웅변술을 구사하는구나 생각하겠지만, 역사가인 살루스티우스가 <유구르타 전기>에서 소개한 마리우스의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연설을 중복되는 부분은  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유구르타 전기>에 실려 있는 마리우스의 연설에서는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고 있어서, 설득력은 있지만 품격이 떨어진다. 하지만 어느 시대에나 대중은 권력자나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는 기꺼이 귀를  기울이는 법이다. 또한 이때마리우스는 로마 역사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병사들을 모집하려 하고 있었다.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63년에 태어났다.마리우스는 기원전 157년에 태어났다.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기원전 154년에 태어났다.세 사람 다 동시대인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시대인이라면, 세 사람 다 그 시대의  로마가 직면해 있던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벽에 부딪쳤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공화정 로마의 중심인 귀족계급에서 태어나 자란 그라쿠스 형제는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로마가 패권자가 되었기 때문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여러 문제를 넓은 시야에서, 다시말하면 정치적인 관점에서 추출해낼 수 있었다.반면에 공화정 로마의 주변부에서 태어나 자란 마리우스는 당면 문제를 정치적으로  생각하고 대책을 세우는 교육도 받지 못했고 그럴 만한  교양도 없었지만, 직업군인으로서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로마 군단이 양적, 질적으로 수준이 저하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그 자신의 체험만 가지고도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결과적으로 말하면, 세 사람 다 실업자 대책에 관여한 셈이 된다.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그라쿠스 형제는 의도적으로, 마리우스는 '비'의도적으로. 그리고 그라쿠스 형제의  구상은 그들의 죽음으로 중단되었지만, 마리우스는 어이없을 만큼 간단하게 그것을 실현해버렸다.집정관에게는 정규 군단 편성권이 주어진다. 제2권 <한니발 전쟁>에서도  말했듯이, 우선35개 선거구가 추첨을 해서 그해에 병사를 제공할 선거구를  결정한다. 추첨으로 병역을 담당하기로 결정된 선거구의 병역 해당자 가운데  17세부터 45세까지의 현역(유니오레스)으로군단이 편성된다. 재산이라고는 자식밖에  없는 자라는 의미의 프롤레타리아(무산자)에게는병역이 면제되어 있었다. 병역이 직접세와 동일시되고 있던 시대였다. 병역 면제는 곧  세금면제였다.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그런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난 직후인  기원전 241년에 이루어진 개정에서는 1만  2천500아세 이하의 재산밖에 갖지 않은 사람은 병역을 면제받았지만,  그후 100년 동안 군사력을 증강해야 할 필요에 쫓길 때마다 '면제 하한선'이 점점 내려갔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고전하고 있을 때 6천 400아세로 내려갔고, 얼마 후에 다시 4천 500아세로 내려갔다가, 결국에는 1천 500아세까지 내려가 버렸다. 이는 그때까지 무산자  계급이라는 이유로 병역을 면제받고 있던 시민들까지도 전쟁터에 끌려나가게 되었다는 뜻이다.야전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성공한 마리우스는 이것이야말로 로마 군단의 질적 양적 수준이 떨어진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신규 p2p사이트 순위 추천 프롤레타리아라고 일괄하여 말해도, 그들 대다수는  실업자가 아니다. 가장이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 가족이 먹고 살  만한 재산을 갖지 않은 사람일뿐이니까, 직업은 가지고 있다. 그  일자리를 팽개치고 병역에 종사한다  해도, 재산이 어느정도 있으면 그동안 가족의 생활이 보장되지만, 그 재산의  하한선이 계속 내려간다면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도 당연했다.또한 병역 자격자의 재산 하한선이 내려갔다고 해서 도시로 흘러드는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그에 따른 사회 불안이 해소된 것도 아니다. 직업조차 없는  그들은 문자 그대로 무산자였기 때문이다.마리우스는 집정관의 권리인 정규 군단 편성을 기존의 징병제가 아니라 지원병 제도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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