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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로마의 병역은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따른 직업으로 바뀌었다. 마리우스의 호소에 응해 지원한 로마 시민들 대다수는 농지를 잃거나 하여 실업자가 된 사람들이다. 시민병이 병역에 종사하는 동안 지급되고 있던 경비는 지원병들의 급료가 되었다.하지만 시민병에게 주는 경비와 지원병에게 수는 급료는 액수에 전혀 차이가 없었다. 급료가 되었다고 해서 액수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실업자로서, 그들은 싼 값에 밀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라도 어엿한 시민이 되는 길을 택한 것이다.실업자 문제가 복지를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 그리고 그이유는 실업이 단순히 생활수단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이유까지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그라쿠스 형제를 다룰 때 이미 언급했다. 그라쿠스 형제는 실업자들에게 농지를 제공하거나 그들을 이주민으로 한 식민시를 건설하거나 공공사업을 진흥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그들 형제가 너무 일찍 죽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마리우스는 이 실업자들을 군대로 흡수했다.그러나 로마 군대는 마리우스의 지원병 제도에 따라 직업군인 집단이 되었다 해도, 로마의 다른 사회 계층에서 유리된 존재는 아니었다. 첫번째 이유는 지원병이 실업자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군인도 직업이니까, 상인이나 농민보다 군인을 직업으로 택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지원했다.두번째 이유는 공화정 로마에서 정치적 출세를 지망하는 자들은 최소한 10년의 군단 경험을 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사견이지만, 고대 로마에서도 특히 공화정시대의 로마 지도자들이 '잔챙이'가 아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공화정 시대의 로마 지도자들은,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철학자 겸 변호사 겸 문필가인 키케로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정계와 관계 및 군대 경험자였다.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은 공화정 로마의 근간을 건드리는 중대한 개혁이었다. 그런데도 이렇다 할 반대 없이 순조롭게 실현되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첫째는, 싸움만 했다 하면 패하거나 애를 먹기 일쑤인 당시의 로마군과 그 군대를 이끄는원로원 계급의 지휘 능력을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로마 시민들이 불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원로원 내부에서도 이 현상을 어떻게든 타파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둘째, 마리우스의 개혁은 농지개혁을 수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유층의 반발을 사지 않았다는 점이다.셋째, 병역에 끌려나갈 필요가 없어진 하층민들과 가슴을 펴고 당당히 살 수 있는 직업을되찾은 '전 실업자'들한테 대단한 호평과 환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네번째 이유는,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체제 밖 개혁'이었던 반면에 마리우스의 개혁은'체제 내 개혁'이었다는 점이다. 마리우스는 호민관 시절에 개혁을 외치지 않고, 집정관으로서 개혁을 실현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체제 내 개혁이라고 해서 안심했던 원로원은 어리석었다. 마리우스는 이 개혁의실행자가 됨으로써, 비천한 출신이라 그때까지 갖지 못했던 '클리엔테스'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그의 휘하에 지원한 프롤레타리아들이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그리고 마리우스의 개혁으로 전쟁터에 나갈 필요가 없어진 하층민들도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민중파'라고 불러도 좋은 당파가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본디 비정치적인 마리우스를 정당의 영수로 밀어올리는 얄궂은 결과를 낳게 되었다.체험을 중시하는 마리우스의 성향을 반영하여 그의 군제 개혁이 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유구르타 문제의 조기 해결을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약속하고 집정관에 당선된 것치고는 아프리카의 전황이 단번에 달라지지도 않았다.그런데도 민회에서 그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마리우스가 얻은 '클리엔테스'들이 '파트로네스'가 된 마리우스를 계속 지지했기 때문이다.그렇기는 하지만, 과감한 전법이 장기인 마리우스를 총사령관으로 맞이함으로써 아프리카전선이 활기를 띤 것은 확실하다. 프롤레타리아 출신 지원병들도 열심히 싸웠다. 게릴라 전법을 구사하는 유구르타의 거점들을 차례로 공략한 로마군은 그해 가을이 끝날 무렵에는 누미디아의 동쪽 절반을 평정하게 되었다.그러나 유구르타는 여전히 건재했다.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끝나고 있는 것은 마리우스의 집정관 임기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절대 지휘권'(임페리움)을 계속 부여해 달라고 로마 민회에 요청했다. 민회는 그것을 가결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기원전 106년에도 마리우스는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아프리카 전선에 파견된 병사들이 고국의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도 효력을 발휘했다. 지원병들은 총사령관 마리우스가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자기들과 똑같은 식사를 하고, 진지를 만드는 작업에도 함께 참여하고,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적과 맞선다고 써 보냈다. 평민 출신 집정관의 평판은 실제 전과보다 먼저 높아졌다.그러나 유구르타 전쟁을 끝내려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이 차츰 분명 해지고 있었다. 마리우스의 과감한 전법으로 유구르타의 기지는 대부분 로마의 수중에 들어왔지만, 유구르타의 최대 후원자인 마우레타니아 왕과 유구르타의 사이를 끊지 않으면 유구르타를 완전히 고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군사적 재능보다 외교적 재능이 필요했다. 마리우스에게는 그 재능이 부족했지만, 그런 마리우스 휘하에 그 방면의 재능을 가진 인물이 새로 가담했다. 회계감사관으로 로마에서 부임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바로 그 인물이었다.로마 역사상 또 하나의 주인공이 등장한 것이다. 그해에 술라의 나이는 32세였다.군단에 배속된 회계감사관은 앞에서도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말했듯이 군단의 총무 겸 경리라 해도 좋을 만큼,병사를 지휘하는 것 외의 모든 일을 도맡는다. 공화정 로마의 정계와 관계에서는 등용문으로 여겨지고 있는 만큼, 민회에서 선출되는 회계감사관 중에는 젊은이가 압도적으로 많다.그런데 민회에서 뽑힌 술라가 뒤늦게 임지에 도착한 것은 그동안 '로마 연합' 동맹시들을순방하며 병력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연합'에서 모집한 기병을 데리고 회계감사관술라가 아프리카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유구르타 전쟁이 분기점에 접어들고 있던 시기였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와는 달리, 스키피오 가문이 속해 있는명문 귀족인 코르넬리우스 일족에 속해 있었다. 다만 조상 가운데 뛰어난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이긴 해도 별로 두드러지지 않은 집안 출신이었다. 평민 귀족인 그라쿠스 가문과는 그 점에서 전혀 다르다.그런 탓도 있어서 술라의 집은 가난했다. 로마에서는 단독주택을 '도무스'라 부르고, 임대아파트는 '인술라'라고 불렀는데, 술라는 귀족이면서도 인술라에 살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일찍 여읜 모양이다.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완벽한 모국어(라틴어)를 사용하고 그리스어에도 능통했지만, 이런 학업도 창녀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이루었다고 한다. 술라라면 확실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 같다. 고학이라는 말만큼 술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독재자 시절에 제작된 근엄한 표정의 초상이 너무 유명해진 탓에, 술라라고 하면 위압적인 인상을 받게 되지만, 실제의 술라는 그렇지도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호방한 성격으로, 일개 졸병한테도 농담을 던져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병사들의 요구를 피붙이처럼 정성껏 들어주기 때문에 평판이 좋았다. 상관에 대해서는 예의를 지키면서도 의연한태도를 잃지 않았고, 할말은 거리낌없이 했다. 키가 훤칠하고, 훗날처럼 곰보가 되지 않았던시절의 그는 살결이 하얀 미남이었고, 행동거지에는 늘 품위가 있었다. 이런 술라에게는 다른 건 몰라도 열등감에 시달리는 점만은 전혀 없었다. 야심가이기는 했지만, 비열한 야심가는 아니었다.32세의 회계감사관은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부임하자마자 총사령관 마리우스뿐만 아니라 병사들한테도 없어서는안될 존재가 되었다. 총무나 경리 업무를 처리하는 외에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전선에 참가할 뿐 아니라, 부족한 실전 경험을 고려하면 과하다 싶을 만큼 홀륭한 전과를 거두곤 했다.그리고 유구르타와 연합하여 싸우다가 로마군에 참패한 마우레타니아의 보쿠스 왕이 은밀히강화 의사를 타진해 왔을 때, 거기에 재빨리 반응한 것도 술라였다.총사령관 마리우스는 외교에는 별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보쿠스왕과 교섭하는 일은 술라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유구르타의 딸을 왕비로 삼은 보쿠스 왕의 제의는 강화를 위한 교섭이라는 분명한 형태가 아니라, "마우레타니아 백성과 로마 시민의 상호 이익을 위한 대화에 총사령관이 신뢰하는 인물 두 사람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식으로 에둘러 말한 것이었다.동료와 함께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보쿠스 왕의 진영에 도착한 술라는 왕을 만나서 강화의 이점을 설명했지만,보쿠스 왕의 태도는 여전히 아리송했다. 첫번째 회담은 결렬로 끝났다. 태도를 정하지 못하고 있는 왕을 술라도 굳이 몰아붙이지 않았다. 그후 유구르타와 보쿠스 연합군은 또다시 로마군에 패했다. 그리고 또다시 보쿠스 왕은 마리우스에게 교섭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해 왔다.이번에는 술라 혼자서 유구르타의 병사들이 배회하는 곳을 통과하는 위험한 역할을 떠맡았다. 보쿠스 왕을 만난 술라는 둘만의 단독 회담을 요구했다. 통역만 데리고 방에 틀어박힌두 사람은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때 술라는 왕에게, 유구르타를 간계로 붙잡아 로마군에 넘겨달라는 조건을 제시한 것 같다. 이튿날 보쿠스 왕은 유구르타에게 사람을 보내잔치에 초대했다. 초대에 응해 도착한 유구르타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쇠사슬에 묶인 채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술라에게 넘겨졌다.오랫동안 로마를 괴롭힌 유구르타 문제도 마침내 해결되었다. 로마인들은 모든 것이 마리우스의 공적이라고 믿고, 그가 아직 아프리카에 있는데도 이듬해인 기원전 104년의 집정관으로 그를 선출했다. 알프스 북쪽에서 야만족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었다.유구르타는 기원전 104년 1월에 로마에서 열린 마리우스 개선식을 쇠사슬에 묶인 몸으로장식한 뒤, 포로 로마노 근처의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누미디아 왕국은 전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패권하에 독립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원로원은 유구르타의 매제를 왕위에 앉혔다. 로마는 누미디아를 속주로 삼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유구르타는 잘못된 방식을 강행한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바람에 왕위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역사가 살루스티우스는 정열을 담은 <유구르타 전기>를 저술했지만, 유구르타 전쟁의 역사적 가치는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을 낳은 것뿐이다. 카르타고의 옛터는 이미 속주가 되어있었고, 누미디아 왕국은 계속 동맹국으로 남고 마우레타니아도 새로 동맹국이 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패권은 지중해 서부 전역에 미치게 되었다.유그르타 전쟁은 로마 역사를 움직인 또 하나의 인물인 술라의 화려한 데뷔 무대가 되었다.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명문 귀족 출신이기는 했으나, 기존의 권력자 계급에는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마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리고 나중의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권력과 부를 장악하고 있던 원로원 계급의 주변부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술라와 카이사르의 집안보다 훨씬 역사가 짧아서 평민 귀족이라고 불린 가문에서 태어난 그라쿠스 형제가오히려 기존 권력 계급의 중심부 출신이었다.비록 명문 귀족이라 해도 '신참자'가 차례로 등장함으로써 웹하드 무료 다운로드 로마의 혼미도 점점 '혁명의1세기'의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인간은 먹고 살 수 없게 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땅으로 이동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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